솔직히 말하면, 택시에서 내릴 때 당황했습니다. 기사분이 "다 왔습니다" 하시는데 창밖엔 고급 아파트 외벽뿐이었거든요. 사진으로만 보던 한옥 정원이 저기 어딘가에 있긴 한 건지, 잠깐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옆으로 돌아가보니 삼면을 높은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그 안에서 너무 멋진 당고개 성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숲 속에서 발견한 첫인상
당고개 순교성지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저는 몰랐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고 "이런 데가 서울에 있어?" 싶어서 저장해 뒀다가 실제로 찾아가게 됐습니다. 성 같기도 하고, 한옥 처마 선이 들어간 건물 외관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태였습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두 팔을 벌리고 맞아주시는 예수님 조각상이었습니다. 그 앞에 서니 이상하게 숨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이는 미사 안내 표지판과 당고개 순교성지 표지판, 두 개 다 형장틀(刑場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형장틀이란 조선시대에 죄인을 묶어 처형할 때 쓰던 틀을 말합니다. 특이하다고 생각한 순간, 왜 저 모양인지가 머리에 꽂히면서 마음이 묵직해졌습니다.
성지 전체 구조는 지하 1층에 성당, 성화전시실(聖畵展示室), 사무실이 있고, 지상 1층에는 잔디광장과 부조상(浮彫像), 야외 제대, 십자가의 길, 한옥 성물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부조상이란 평면 위에 형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넣은 조각 기법으로, 이곳에서는 당고개에서 순교한 10명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쓰였습니다. 한옥 성물방은 너무 가보고 싶었는데 제가 방문한 날 문이 닫혀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다음에 꼭 열린 날에 다시 가봐야겠습니다.
성모님 조각상도 기억에 남습니다. 흔히 보던 서양식 표현이 아니라, 한복을 입은 여인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성지가 단순히 슬픔을 기억하는 공간이 아니라 따뜻함을 품고 있다는 걸 그 조각 하나로 먼저 느꼈습니다.
기해박해와 열 명의 순교자들
이 성지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관평동 성당에서 작년에 순교자들의 일생을 공부하면서 노트 필기를 했는데, 적다가 눈물이 난 적이 있었거든요. 갖은 고문과 협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신앙을 지켜낸 분들의 이야기를 글로만 읽다가, 그분들이 실제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땅을 직접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기해박해(己亥迫害)란 1839년 조선 헌종 때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사건을 뜻합니다. 이 박해로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당고개는 그 마지막 처형지 중 하나로 열 명의 순교자 분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의 그림이 한복 차림으로 벽면에 나란히 그려져 있는데, 직접 보니 공부할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특히 여성 순교자분들은 그림 속에서도 체구가 가늘고 여려 보이셨습니다. 저렇게 여린 몸으로 어떻게 그 고문을 버티셨을까, 생각하니 그냥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성례(마리아) 순교자님이 특히 눈에 밟혔습니다. 이분이 바로 조선 2대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신부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인으로서 김대건 신부님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분으로, 평생을 숨어 다니며 신자들을 돌봤습니다. 그 뒤에 이런 어머니가 계셨구나, 싶으니 최양업 신부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현재 당고개 순교성지와 이분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Via Crucis)이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까지 걸어가신 수난 여정을 14처(處)로 나누어 묵상하는 신심 행위를 말합니다. 정원에 마련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순교자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니,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걸으며 기도하는 행위가 이렇게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그날 다시 실감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가볼 만한 이유
성지순례(聖地巡禮)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 곳까지 버스 타고 이동하는 거창한 행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당고개 성지는 지하철로 충분히 올 수 있는 도심 한가운데 있습니다. 순례지(巡禮地)란 신앙적·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를 직접 방문하며 묵상하는 공간을 뜻하는데, 이런 순례지가 용산 아파트 단지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성당 내부는 황토색 벽면 덕분에 한옥처럼 정겹고 따뜻한 분위기였습니다. 크지 않은 작은 공간이라 오히려 더 집중이 잘 됐습니다. 잠시 앉아서 조용히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왔는데, 들어갈 때보다 마음이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분들도 역사적 공간으로서 충분히 의미 있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문화재청도 이처럼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공간의 보존과 활용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방문 전에 꼭 알아두셔야 할 점을 정리하면, 성당 개방 시간이 오후 5시까지로 생각보다 일찍 문을 닫습니다. 저도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갔기 때문에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었는데, 모르고 늦게 갔다면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주변에 신계역사공원이 있어서 방문 전후로 가볍게 산책하기에도 좋은 동선입니다.
당고개 성지를 다녀온 뒤로, 성지순례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준비하거나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 하나가 일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삶이 좀 버겁게 느껴지거나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당고개 순교성지가 그 답이 될 수 있습니다. 한옥 성물방이 열려 있는 날에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계절이 바뀐 정원도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